Written in interview by Park Sang-gyu. Korean only, (2015 Daum crowdfunding series).
지리산에 갔다 왔어요?
저 멀리 지리산 노고단이 하얗게 보였다. 지리산 아랫마을 구례에 내린 비는 1500m 고지 노고단에서 눈으로 바뀌었나보다.
쌓인 눈은 자기 몸을 불릴 게 분명했다. 2014년 12월 7일, 겨울 바람이 세를 키울 때였으니까.
휴가가 끝났으니 이제 서울로 돌아갈 시간. 구례버스터미널에서 서울행 버스표를 끊었다. 버스가 오려면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이려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백인 남자가 자기 얼굴보다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카페로 들어왔다. 그의 푸른 눈과 내 검은 눈이 마주쳤다. 영어를 못하는 나는, 그가 말을 걸까봐 눈길을 돌렸다.
뚜벅뚜벅 내게 걸어오는 이 남자. 헉, 왜 하필 나란 말인가!
“지리산에 갔다왔어요? 눈 좋아? 멋있어?”
키가 훤칠한 이 백인은 어설프게나마 한국말을 했다. 다행이었다. 나는 어설픈 영어대신 완벽한 한국어로 답했다.
“산에 안 갔어요. 지리산 밑 피아골계곡에서 민박하면서 쉬었어요. 2박3일 동안.”
차라리 내 말을 못 알아들었으면 싶었다. 그러면 우리의 대화도 금방 끝날 테니까. 기대는 빗나갔다. 이 남자, 내 말을 알아들었다. 오히려 나를 보는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피아골 좋아요. 나도 가봤어요!”
어쩌란 말인가. 카페 주인장과 손님 몇 명이 우리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부담스러웠다. ‘영어 울렁증’이 있는 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마음이 급했다. 나는 급히 옷을 입고 가방을 챙기면서 이제 떠나야 한다는 걸 ‘바디 랭귀지’로 표현했다.
갑자기 이 남자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카페 책꽂이로 몸을 휙 돌리더니 책 한 권을 꺼내 왔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당신, 도대체 내게 왜 이러는가. 왜 나란 말인가! 이제 좀 그만!’
“이 책 내가 냈어요. 내가 다 찍은 사진이에요. 나 백두대간 종주했어요. 지리산에서부터 백두산까지.”
상황은 역전됐다. 내 눈은 커졌다. 가슴이 뛰었다. 영어 울렁증이 있는 내 입에서 저절로 외마디 영어가 터졌다.
“리얼리?”
“슈어!”
가방을 내려놓고 이 남자가 꺼내온 책을 펼쳤다. 책 제목은 ‘코리아 백두대간 남과 북의 산들’.백두산부터 지리산까지 한반도 백두대간의 장쾌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이 담긴 사진집이다. 특히 처음 보는 북한 쪽 산이 흥미로웠다.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이거 정말 당신이 찍은거예요? 당신이 북한까지 갔다왔다고? 정말 백두대간 종주했어요?”
갑자기 몰아친 한국말에 이번엔 이 백인이 당황했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돌렸다.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는 듯했다. 카페 주인장이 내 말을 영어로 바꿔줬다. 남자의 눈빛이 의기양양하게 바뀌었다.
“나 북한 여섯 번 갔다 왔어요! 백두대간 종주했어요!”
그가 책을 펼치며 하나하나 설명했다.
“이건 백두산, 이건 양강도 두류산, 칠보산, 철옹산.”
이 땅에서 나고 자랐지만 한 번도 가보지도, 밟아보지도 못한 북한 쪽의 산. 고작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정도만 아는 한국인에게 백두대간을 쭈욱 설명하는 이 서양 남자. 이 상황은 도대체 뭘까.
한반도는 75%가 산이다. 이 땅의 지형은 백두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백두대간을 근간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 삶의 원형과 문화는 산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하지만 1948년 분단 이후 백두대간도 끊겼다. 그날 이후 백두대간을 종주한 사람은 남과 북을 합쳐 단 한 명도 없다. 우리 땅을 자유롭게 걷지 못하는 현실.
그런데 이 외국인이 먼저 걸어봤다고? 살짝 배가 아팠다. 시계를 보니, 서울행 버스가 떠날 시간이 다 됐다. 마음이 급했다.
“당신 나랑 인터뷰 좀 합시다.”
나는 그제서야 기자라는 직업을 밝혔다. 명함을 주려고 지갑을 뒤졌으나 하필 그때 다 떨어지고 없었다. 부끄러움을 잊고 카페 주인장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오마이뉴스’에 다니는 기자인데, 가까운 시일 안에 연락할 테니 인터뷰하자고 말이다. (나는 2014년 12월 31일 자로 ‘오마이뉴스’에 사직서를 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연락처를 그에게 적어줬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의 푸른 눈을 똑바로 보고 못을 박았다.
“나, 나쁜 사람 아니에요. 우리 꼭 다시 만나야 해!”
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웃었다. 이젠 정말로 떠나야 한다. 버스 떠날 시간이 임박했다. 마지막으로 ‘나도 영어 좀 한다’는 걸 그에게 보여주려 완벽한 영어로 당당하게 그에게 물었다.
“What’s your name?”
“Roger Shepherd.”
“Where are you from?”
“New Zealand.”
북한 양강도 두류산에서 만난 북한의 아이들 ⓒ로저 셰퍼드
뉴질랜드에서 온 로저 셰퍼드. 2015년 현재 지리산 아래 전남 구례군 거주. 현존 유일무이 백두대간을 종주한 사람. 그가 들려주는 남북 백두대간 이야기는 이렇게 우연으로 시작됐다.